계약서에 "수리비는 세입자 부담"이라고 적혀 있으면, 뭐가 고장 나든 내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많은 세입자가 보일러가 고장 나도, 누수가 생겨도 "특약에 적혀 있으니까"라며 자비로 수리한다.
그런데 대법원은 다르게 판단한다. 소규모 수선만 특약으로 세입자에게 넘길 수 있고, 보일러 교체처럼 기본 설비에 해당하는 대규모 수선은 특약이 있어도 집주인이 책임진다.
1️⃣ 집주인의 수선의무, 어디까지인가
민법 제623조는 "임대인은 목적물을 임차인에게 인도하고 계약 존속 중 그 사용, 수익에 필요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의무를 부담한다"고 규정한다. 쉽게 말하면, 세입자가 집을 정상적으로 쓸 수 있도록 관리하고 고쳐주는 건 집주인의 법적 의무다.
대법원도 이 원칙을 구체화했다. "목적물에 파손 또는 장해가 생긴 경우에 그것을 수선하지 아니하면 임차인이 계약에 의하여 정하여진 목적에 따라 사용·수익하는 것을 방해받을 정도의 것이라면 임대인은 그 수선의무를 부담한다"고 판시했다(대법원 2011다107405).
2️⃣ 특약이 있어도 대규모 수선은 집주인 몫
이 부분이 핵심이다. 계약서에 "수리비 세입자 부담"이라는 특약이 있다 하더라도, 모든 수리를 세입자에게 떠넘길 수 있는 건 아니다.
대법원은 "임대인의 수선의무를 특약에 의하여 면제하거나 임차인의 부담으로 돌리는 것은 소규모 수선에 한하며, 기본적 설비 부분의 교체 등과 같은 대규모 수선은 여전히 임대인이 수선의무를 부담한다"고 명확히 판시했다(대법원 94다34692).
여기서 대규모 수선과 소규모 수선의 기준은 이렇다.
집주인 부담 (대규모 수선)
- 보일러 교체 (통상 교체 주기 7-10년, 노후 교체 포함)
- 누수 방지 공사, 수도 배관 교체
- 지붕 방수, 벽 균열 보수
- 화장실 배관 수리
세입자 부담 (소규모 수선)
- 전구 교체, 문고리 수리
- 수도꼭지 패킹 교체, 방충망 교체
- 벽지 부분 보수
3️⃣ 집주인이 안 고쳐주면? 내가 고치고 비용 청구할 수 있다
많은 세입자가 모르는 권리가 하나 있다. 집주인에게 수리를 요청했는데 미루거나 거절할 때, 세입자가 직접 수리하고 그 비용을 돌려받을 수 있다.
민법 제626조 제1항은 "임차인이 임차물의 보존에 관한 필요비를 지출한 때에는 임대인에 대하여 그 상환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것을 필요비 상환청구권이라 하는데, 보일러 수리비나 누수 보수비처럼 집을 정상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비용이 여기에 해당한다.
필요비는 임대차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출 즉시 청구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4️⃣ 필요비와 유익비, 무엇이 다른가
비슷해 보이지만 청구 시점과 조건이 완전히 다르다.
- 필요비: 임차물의 보존을 위한 비용. 보일러 수리, 누수 보수, 배관 교체 등. 지출 즉시 청구 가능(민법 제626조 제1항)
- 유익비: 임차물의 객관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비용. 인테리어 업그레이드, 시설 개선 등. 임대차 종료 시 가액 증가가 남아 있을 때만 청구 가능(민법 제626조 제2항)
대법원은 "유익비 상환범위는 임차인이 지출한 비용과 현존하는 증가액 중 임대인이 선택하는 바에 따라 정하여진다"고 판시했다(대법원 86다카2342). 유익비는 집주인이 더 적은 금액을 선택할 수 있으므로, 큰 비용을 들인 인테리어를 전부 돌려받기는 어렵다.
5️⃣ 수리비 분쟁이 생겼을 때 대처 순서
- 고장 사실을 집주인에게 문자 또는 카카오톡으로 알린다 (증거 확보)
- 수리 요청 후 합리적 기간(통상 1-2주) 내 응답이 없으면 재차 요청한다
- 그래도 응하지 않으면 직접 수리하되, 수리 전 현장 사진과 견적서를 확보한다
- 수리 완료 후 영수증과 함께 필요비 상환을 서면으로 청구한다
- 집주인이 거부하면 대한법률구조공단(132) 무료 상담 후 민사조정 또는 소액심판을 검토한다
💡 핵심은 증거다. 고장 상태 사진, 집주인과의 대화 기록, 수리 견적서와 영수증을 반드시 남겨두자.
6️⃣ 세입자 과실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든 수리가 집주인 책임은 아니다. 세입자의 잘못된 사용이나 부주의로 고장이 발생한 경우에는 세입자가 수리비를 부담해야 한다.
- 보일러 온도조절장치를 임의로 분해한 경우
- 배관을 무단으로 변경하거나 조작한 경우
- 보일러실에 물건을 쌓아 통풍을 막아 고장이 난 경우
정상적으로 사용했는데 노후로 인해 고장난 것인지, 세입자 과실인지가 분쟁의 핵심이다. 수리 기사의 소견서를 받아두면 나중에 분쟁이 생겼을 때 유력한 증거가 된다.
✅ 마무리
"수리비 세입자 부담"이라는 특약을 보고 모든 수리를 내 돈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 없다. 보일러, 배관, 누수 같은 대규모 수선은 특약이 있어도 집주인 책임이고, 집주인이 안 해주면 직접 수리 후 **필요비 상환청구권(민법 제626조)**으로 돌려받을 수 있다.
계약서 특약만 보고 포기하지 말고, 내 권리를 확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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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법령: 민법 제623조(임대인의 의무), 민법 제626조(임차인의 상환청구권), 대법원 94다34692, 대법원 2011다107405, 대법원 2009다96984, 대법원 86다카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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